이종욱 (승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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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종욱은 강원도 평창 출신의 승려로, 13세에 출가하여 3·1 운동에 참여하여 독립운동가로 활동했다.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했으나, 1920년대 중반부터 친일 행적으로 전환하여 일제강점기 동안 적극적으로 협력했다. 해방 이후에는 우익 정치인으로 변신하여 국회의원을 역임하고 불교계 원로로 복귀했으나, 친일 행적으로 인해 논란이 되었고, 2010년 건국훈장이 취소되었다.
강원도 평창 출신으로 13세에 출가하여 오대산 월정사에서 승려 생활을 했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만세 시위에 참가하고 이탁의 27결사대에 가입했다. 한성임시정부와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강원도 대표를 맡았다.
이종욱은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으나, 친일 행적 논란으로 2010년 서훈이 취소되었다. 1993년 대한민국 국가보훈처의 독립유공자 재심 대상에 올랐고,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의 친일파 708인 명단,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2. 생애
1923년 상하이에서 귀국하여 월정사에 복귀했고, 1930년 조선총독부의 임명을 받아 주지가 되었다. 1936년 미나미 지로 총독 환영식에 불교계 대표로 참가했고, 1937년에는 총본산 건설위원회 대표가 되는 등, 중일 전쟁 이후 적극적으로 일본에 협력했다. 광복 후 종무총장 직에서 사퇴하고 승권 정지 징계를 받았다.
그러나 이후 우익 정치인으로 변신하여 반탁 운동에 참여하며 불교계 원로로 복귀했다. 1950년 고향 평창에서 제2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고, 1951년 동국대학교 재단이사장, 1952년 중앙총무원장을 역임했다. 동국대학교 이사장 시절 친일 승려 권상로를 총장으로 기용하기도 했다.
2. 1. 독립운동 참여 (1910년대 ~ 1920년대 초)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났을 때, 이종욱은 월정사 승려로 만세 시위에 참가했고, 이탁의 무장 단체인 27결사대에도 가입했다. 3·1 운동의 결과로 한성임시정부가 세워지자 강원도 대표로 참가했으며,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설치된 임시의정원에서도 강원도 대표를 맡았다.[1]
그러나 이종욱은 1920년대 중반부터 다시 국내 불교계에서 활동했다. 해외로 망명까지 했던 독립 운동가에서 친일파로 전향하게 된 계기와 정확한 시기는 분명치 않다. 1923년에는 상하이에서 국내로 돌아와 월정사에 복귀해 있었다.[1]
2. 2. 친일 행적 (1920년대 중반 ~ 1945년)
이종욱은 1920년대 중반부터 다시 국내 불교계에서 활동했으며, 이때부터 광복 시점까지 일관되게 친일 행적을 남겼다. 해외 망명까지 했던 독립운동가에서 친일파로 전향하게 된 계기와 정확한 시기는 분명하지 않다. 1923년 상하이에서 국내로 돌아와 월정사로 복귀했고, 1930년 조선총독부의 임명을 받아 월정사 주지가 되었으며, 그해 불교계 대표격인 종회(宗會) 의장으로도 선출되었다.
이종욱이 일제에 겉으로 드러나도록 협조한 것은 1936년 미나미 지로 조선총독 부임 때 불교계를 대표하여 미나미 환영식에 참가한 무렵부터이다. 1937년 31개 본산 주지들이 모여 총본산(조계종)을 설립하기로 했을 때 총본산건설위원회 대표가 되었는데, 당시 이처럼 불교계 수장으로 인정받기까지는 조선총독부의 후원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중일 전쟁 이후에는 일본군을 위한 기원 법회나 시국 강연회를 열어 일본이 일으킨 전쟁에 적극적으로 협력했다. 《신불교》 등 잡지에 친일 논설을 싣기도 했다. 전쟁 지원을 위한 친일 단체인 국민총력조선연맹, 임전대책협의회, 조선임전보국단에도 빠짐없이 가담했다.
3. 논란과 평가
현 조계종 창설에 기여한 이종욱에 대한 친일파 논란은 불교계의 반발을 샀다. 이종욱을 항일 투사로 평가하거나, 친일 행위가 위장전술이었다는 주장이 담긴 연구도 진행되었다.[1][2]
3. 1. 친일 행적 논란
이종욱은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으나, 1993년 대한민국 국가보훈처가 친일 경력이 있는 독립유공자들을 대상으로 재심을 할 때 재심 대상자 8명 중 한 명으로 명단에 올랐다.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이 발표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모두 선정되었다.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현 조계종을 사실상 창설한 인물인 그를 겨냥한 끊임없는 친일파 논란은 불교계에서 적지 않은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이를 반박하기 위한 연구도 진행되었다. 예를 들어 동국대에서 석사학위 논문으로 제출된 박희승의 《지암 이종욱 연구》(동국대 불교대학원, 2000)는 이종욱의 대동단 가담이나 김구와의 만남 등에 대해 서술하면서 항일 투사로 평가하고 있고[1], 친일 행위 자체가 고도의 위장전술이었다는 주장[2]도 있다. 2010년 서훈이 취소되었다.
3. 2. 상반된 평가
이종욱은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으나, 1993년 대한민국 국가보훈처가 친일 경력이 있는 독립유공자들을 대상으로 재심을 할 때 재심 대상자 8명 중 한 명으로 명단에 올랐다.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이 발표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모두 선정되었다.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현 조계종을 사실상 창설한 인물인 그를 겨냥한 끊임없는 친일파 논란은 불교계에서 적지 않은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이를 반박하기 위한 연구도 진행되었다. 예를 들어 동국대에서 석사학위 논문으로 제출된 박희승의 《지암 이종욱 연구》(동국대 불교대학원, 2000)는 이종욱의 대동단 가담이나 김구와의 만남 등에 대해 서술하면서 항일 투사로 평가하고 있고, 친일 행위 자체가 고도의 위장전술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2010년 서훈이 취소되었다.
4. 역대 선거 결과
참조
[1]
간행물
불교계 친일행적 어떻게 볼 것인가
http://www.budreview[...]
2002
[2]
뉴스
이종욱스님 친일은 위장전술
http://www.buddhistn[...]
불교신문
2007-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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